현진영 STORY: 아이돌에서 진정한 재즈 아티스트로

KPOP 아이돌의 시작이자 한국 힙합의 시작점에 위치한 현진영. 현진영은 가세가 기울면서 어렸을 때부터 댄서로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SM의 이수만과 닿아 SM의 1호 아이돌 가수로 데뷔하는 천금과 같은 기회를 얻게 된 행운아다. 하지만 심적으로 …

현진영_STORY

KPOP 아이돌의 시작이자 한국 힙합의 시작점에 위치한 현진영. 현진영은 가세가 기울면서 어렸을 때부터 댄서로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SM의 이수만과 닿아 SM의 1호 아이돌 가수로 데뷔하는 천금과 같은 기회를 얻게 된 행운아다. 하지만 심적으로 불안했던 탓에 여러 사고를 저지르게 되었고, 최고의 자리에 가까워졌을 때 바닥까지 추락해버린 아쉬운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마음만은 진심이었던 덕분에 항상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도전했고, 결국에는 그러한 과거를 딛고 일어나 진정한 재즈 아티스트로 부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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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현진영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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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어린나이에 댄서가 되다 (1971년 ~ 1987년)

미8군에서 한국인 최초 재즈밴드인 트리플 A를 만든 재즈 피아니스트 허병찬의 아들로 태어난 현진영. 현진영은 어렸을 때부터 미 8군 근처에서 자라 흑인 문화에 일찍 눈을 떴다. 유앤빌리지에서 살면서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당시 아무나 살 수 있던 곳이 아니었던 유앤빌리지의 집에는 방이 13개, 전용 요리사나 청소부가 있었고 수영장까지 딸렸을 정도였다. 어렸을 적부터 외국인 친구들과 춤을 추기 시작한 현진영은, 디스코 댄스를 시작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 브레이크 댄스를 친구들과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미 이때부터 춤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어머니의 암 투병에 아버지까지 쓰러지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1984년, 14세 때, 첫 눈 내리던 날(11월 14일)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었고, 그 때 부터 현진영의 인생은 힘듦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로에 갔다가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본인의 실력이 그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은 현진영은 댄서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고, 생계를 위해서 신문배달을 비롯한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던 현진영은, 15살 때 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비보이팀인 스파크의 2기 멤버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댄서 생활은 굉장히 힘들었고, 그런 삶에 너무나도 지친 현진영은 댄서 생활 중 너무 힘들어서 두번의 자살 시도 경험을 했는데, 처음은 한남대교에서 뛰었으나 한강 정화를 위한 배를 타고 지나가던 인부가 구해줬고, 두 번째는 댄서 생활중 급여를 반년 이상 못받은 채 매니저가 도망을 가서 절망에 빠져 동호대교서 자살 시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뛰어내리고 물에 빠진 뒤, 발이 닿는 느낌이 들어서 박차 올라 살수 있었다고 하는데, 현진영은 당시 절대로 발이 닿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머니의 가호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현진영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러 댄스팀을 옮겨다니면서 각 팀의 시그니처 댄스들을 배우면서 댄스의 저변을 크게 넓히게 된다.

*스파크 1기 시절, 춤을 배우러 들어온 개그우먼 팽현숙(당시 일반인)의 전담 선생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1987년 무렵, 스파크에 3기로 다시 가입하게 되면서 방송 출연을 하는 등 활동이 넓어지게 되는데, 김승진와 하얀손의 “난 네가 좋아”(1987)팀에 합류한 것을 시작으로 장혜리와 에레스테의 “추억의 발라드”(1987) 댄스팀에 합류하였고, 박남정이 “사랑의 불시착”(1988)으로 활동할 당시 백댄서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민해경과 블랙타이거즈에도 합류하여 “그대 모습은 장미”(1988) 때 활약하기도 했다. 김완선의 백댄서로도 활동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정확한 시기와 노래명을 기억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강원래와 취한상태로 주먹다짐을 했던 적이 있는데, 현진영은 강원래가 먼저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본인이 이긴것으로 기억하지만, 강원래는 때리다 지쳐서 갔다고 한다. 최진열 말로도 아마 강원래가 이겼을 것이라고…


02. 현진영과 와와 (1989년 ~ 1990년)

KPOSTORY_현진영과 와와

03. 또 다시 추락한 우상 (1993년 ~ 1998년)

현진영의 2집 앨범은 100만장이 넘게 팔리며 밀리언 셀러를 달성했고, 현진영은 1992년 크리스마스에 첫 단독 콘서트를 열게 된다. 93년까지 이어진 활동은 현진영을 대한민국 대표 가수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도왔고, 현진영의 성공을 계기로 SM과 이수만은 여러 방향으로 저변을 넓히게 된다. 특히 새 앨범차 미국으로 출국하게 됐을 때 즈음 교민들을 위한 콘서터를 하면서 게리 분(Gary Boone)과 친분을 만들게 되면서 추후에 SM이 교포 출신 아티스트들을 영입하기 위한 기반을 만들게 된다.

1993년 여름, 현진영과 SM은 3집 앨범을 위한 준비를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힙합에 락 그리고 태평소를 비롯한 국악까지 첨가한 퓨전 음악에 가까운 앨범을 발매한 서태지와 아이들과는 달리 기존보다 더욱 블랙 뮤직에 가까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분주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직접 아프리카 원주민의 소리를 직접 따고 인순이에게 피쳐링을 부탁했으며, 재즈를 활용 하거나(바로 너!), 과거의 명곡들을 샘플링 하는 등 음악적인 부분에서도 최대한 신경을 썼고, 직접 흑인 댄서들을 섭외하고 와와의 멤버도 추가 영입 하면서 힙합이라는 슬로건을 제대로 내밀 준비를 한다. 그렇게 Int.World Beat And Hiphop Of (New Dance vol. 3)(1993.09)을 발매하게 되는데, 현진영은 이미 슈퍼스타였기 때문에 선주문만 100만장에 가깝게 들어올 정도였다.

*3집의 와와는 두 명이 아닌 백댄서 전체였고, 그중 한 명이 션(지누션)이다.

하지만 겉에서 보이는 것과는 달리 현진영은 여러가지 우여곡절로 인해 피폐해진 상태였다.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SM의 재정 상태도 굉장히 위태한 상황이었다. SM의 재정은 음반판매를 맡고 있던 서라벌레코드의 판매량과 매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서라벌레코드가 뉴키즈 온더 블록의 콘서트를 주최하는 과정에서 여러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면서 거의 부도가 나게 된 것이었다. 서라벌레코드의 악재 때문에 SM은 현진영의 2집 앨범(85만장)에 대한 판매 수익 약 5억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여러 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현진영은 10월, 3집의 타이틀곡 “두근두근 쿵쿵”(1993)으로 인기몰이를 이어가지만, 11월 초, 이번에는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이 된다. 현진영은 절친 이탁과 함께 종종 필로폰 투약을 하고 있었고, 이런 마약의 줄기를 쫓던 경찰이 8개월간의 수사 끝에 유통망을 검거하게 되면서 현장에 있던 현진영과 이탁을 체포한 것이었다.

*당시 이탁은 전역한 구준엽과 함께 탁2준2를 결성해서 활동중이었고, 이 팀 역시 해체가 된다.

이 일로 SM은 사실상 폐업을 해야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서라벌 레코드에서 선주문으로 제작한 40만장의 앨범과 브로마이드 등의 캐릭터 상품들을 폐기처분 해야했기 때문이다. 결국 SM은 다시는 현진영을 방송에 출연시키지 않는다고 선언하게 되고, 이 때 생긴 부채를 무마하기 위해 본인이 운영하던 역삼동의 카페와, 월미도의 레스토랑을 처분하게 된다. 굉장히 상황이 어려워진 SM이었지만 그래도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이수만은 현진영을 용서한다고 했다고 한다.

현진영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본인의 말로는 이때 본인은 오만방자의 끝이었고, 세상 마음대로 살았다고 한다. 어쨌든 다시 구치소에 입소한 현진영은 노래를 부르라는 말에 자신은 무대위가 아니면 노래를 하지 않는다 했다가 멍석말이를 당했고, 결국 노래를 했으며, 옆 방에서 전인권이 노래하는 소리도 들었다고 한다.

*출소 후, 박진영이 데뷔하기 전에 중학교 후배 댄서가 박진영을 소개, 노래를 듣고 평가를 해줬었다고 한다. 당시 굉장히 세련됐다고 평가를 했으나 박진영의 얼굴을 보고 성공에 대해서는 회의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1997년, I.W.B.H를 이탁과 결성하여 스페셜 앨범 <I.W.B.H.(INT. World Beat And Hiphop)>(1997.09)을 발매한다. 미국 갱스터 힙합이 대세일 적에 영향을 받아서 갱스터랩을 한 앨범으로, 현진영이 구치소에 있었을 때의 기억을 영감으로 만든 노래들이 있다고 한다. 특히 힙합계에서는 나름 의미가 있는 앨범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1998년 6월, 이번에는 본드 흡입으로 또 다시 구속이 된다.


04. 재기를 위한 고군분투, 재즈 뮤지션 현진영

2000년, 방황을 하고 있던 그에게 현재의 아내인 오서운을 헬스장에서 만난 현진영은 한 눈에 반하게 되었고, 책을 빌린다는 핑계로 조금씩 친해지면서 나타나 교제를 시작하게 된다. 2002년 1월, 댄스 음악에서 탈피하여 그의 가창력을 옅볼 수 있는 Wild Gangster Hiphop 21C New Dance vol. 4(2002.01.01)을 발매하는데, 발매와 동시에 여자친구 오서운의 권유로 기자회견을 하고 순천향대학 병원 정신과에 입원을 하게 된다. 이후 마약퇴치를 위한 공익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후 10년간 공부해온 재즈에서 어느정도 결실을 맺고, 2004년에 본인이 뽑는 최고의 곡인 “소리쳐봐”(2006)을 완성한다. 그리고 2006년, 현재 마지막 정규 앨범이자 다섯번 째 정규앨범 <Street Jazz In My Soul>(2006.03.27)을 발매한다. 앨범 제작 당시 137kg까지 살이 쪘던 현진영은 증량에 따라 저음이 좋아지는 것을 알게 되어 한동안 녹음때 살을 찌우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은 신해철도 했던 방식인데, 후에 건강에 좋지 않음을 느끼고 그만두게 된다.

현진영은 정규 5집을 기점으로 기존의 힙합 가수에서 완전한 재즈 가수로 노선을 변경한다. 이후, 5집의 뮤직비디오를 찍어준 봉만대의 영화인 신데렐라의 O.S.T. 앨범 <신데렐라 O.S.T. (현진영 Project)>(2006.09.08)을 제작했고 방송 활동도 다시 시작하는 등 가수로서 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특히 2020년대에 들어서는 유튜브를 비롯한 개인 플랫폼이 늘어나면서 가수 활동 외에도 방송에 얼굴을 자주 비치게 되었으며, 고정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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