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한국 댄스의 출발점 UCDC와 스파크 [KPOP STORY]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 댄스 가수의 등장은 1979년보다 한참이나 빠르다. 60년대, 트위스트의 시대에 등장한 트위스트 김이나 디스코 시대의 이은하 등 여러 가수들이 있었지만 전문적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은 U.C.D.C의 등장과 함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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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 댄스 가수의 등장은 1979년보다 한참이나 빠르다. 60년대, 트위스트의 시대에 등장한 트위스트 김이나 디스코 시대의 이은하 등 여러 가수들이 있었지만 전문적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은 U.C.D.C의 등장과 함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여러 자료들과 서적들을 통해 대한민국 댄스의 역사를 역대 그 어떤 자료보다도 상세하게 정리하고 기술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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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한국 최초의 댄스팀 U.C.D.C의 탄생 (1979년)

U.C.D.C(United College Dancing Club)

70년대 말, 서울의 춤꾼들은 다 같이 팽고팽고 나이트에서 모여서 춤을 추는 것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날, 여러 댄서들이 나이트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팽고팽고 지하 다방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10명 정도의 춤꾼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댄스팀을 결성하자는 이야기를 꺼냈고,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1기 회장으로 선출된 것이 이성문이다. 당시 이성문은 박승대, 박우열과 함께 스프링 삼총사로 불리면서 사실상 팽고팽고 댄서들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U.U.D.C(United University Dancing Club)이 될 뻔 했지만 여러 대학, 여러 과의 사람들이 모여서 결성이 되었기 때문에 University가 아닌 College(U.C.D.C – United College Dancing Club)로 선택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먼저 결성이 된 뒤에, 이야기가 퍼져나가면서 전국 여러 지역에 지부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춤을 춘다는 모든 젊은이들은 U.C.D.C를 거치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춤꾼들이 늘어나고 모여들어 자신들을 알리기 시작하면서 대한민국 방송업계에도 변화가 닥치기 시작한다. 특히 이택림이 진행하는 <MBC 영 일레븐>에 출연하면서 유명해지는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비슷한 그룹으로는 이주노의 스승격인 김규태가 만든 댄스팀인 LYTC(Little Young Turks Club)도 존재했었는데, 이 두 댄스팀은 팽고팽고 외에도 무교동 코파카바나, 신라호텔 등지에서 춤을 췄다고 한다.

U.C.D.C 임원진/멤버

  • U.C.D.C 서울(1979)
    • 이성문(1기 회장), 임용일(2기 회장), 문영주(3기 회장), 신원철(4기 회장), 이문형(5기 회장), 이재민(고문)
  • U.C.D.C 대구(1980)
    • 우민수(1기 회장), 박배석(2기 회장), 김봉석(3기 회장), 박신근(4기 회장), 이승호(5기 회장)
  • U.C.D.C 광주(1981)
    • 노일환(1기 회장), 이상호(2기 회장), 이승용(5기 회장)
  • U.C.D.C 부산(1981)
    • 강원목(1기 회장), 권혁주(2기 회장), 박보성(3기 회장), 김재호(4기 회장), 허병호(5기 회장)
  • 기타 주요 멤버
    • 도건우, 송재준

U.C.D.C 활동 내용

  • <KBS 젊음의 행진> 1980
  • <MBC 영 일레븐> 1980
  • <KBS 국풍 81> 1981
  • <MBC 1981 대학가요제> 1981
  • <MBC 쇼 2000> 1981
  • <MBC 1982 대학가요제> 1982
  • <광고 : 킨사이다 w이덕화> 1982

02. 방송국까지 뻗어나간 댄서들 (1980년대 초)

방송국 무용단 창단

(U.C.D.C의 영향력이 컸던 만큼 대부분의 단원들은 U.C.D.C 출신이라고 한다)

댄서들이 늘고 젊은이들의 댄스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면서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방송가이다. 방송가는 청춘들을 위한 방송을 편성하기 시작하면서 대학생 춤꾼들이 자신들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게 된다. 비록 방송의 메인 스타가 무용단인 것은 아니었지만, 무용단 만의 코너도 편성하면서 대중들이 댄스에 대해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 것과 같았다. 그렇게 대중들이 춤과 조금 더 가까워지면서 방송국 뿐만이 아니라 가수들도 댄서들과 협업을 하기 시작한다.

방송국 무용단 활동 멤버

  • MBC<영일레븐>의 영스타(영스타즈)
    • 김경란, 미애
  • KBS<젊음의 행진>의 짝꿍
    • 장준진, 함윤상(함윤상과 코인스), 김태형(소방차), 정원관(소방차), 이상원(소방차), 김광수

03. 최초의 전문적인 댄서 육성 프로그램 (1982년)

인순이와 리듬터치 결성

70년대 후반, 미8군 부대 출신의 팝/라틴음악 가수 한백희가 당시 백댄서였던 인순이의 노래실력을 알아보고 그녀를 키우기로 결심하게 된다. 1978년, 인순이를 필두로 희자매를 데뷔시키고 괜찮은 성공을 이끌어내지만, 워낙 살벌했던 한백희의 관리 때문인지 두 명이 탈퇴하고 인순이만 남게 된다. 한백희는 당시 떠오르던 댄스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고, 리듬터치라는 댄스팀을 만들기 위해 마포에 100평이 넘는 연습실을 마련하고 방송국에서 만난 U.C.D.C 회장 출신 이성문을 섭외해서 댄서들을 기르게 된다.

1982년 3월, 리듬터치는 댄서를 구한다는 공고를 냈고, 엄청난 수의 춤꾼들이 오디션을 보기 위해 마포의 연습실에 찾아오게 된다. 그렇게 주노 등이 합류하게 되고, 인순이는 사상 처음으로 방송국 무용단이 아닌 독자적인 댄스팀을 가진 가수가 된다. 그렇게 1983년,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밤이면 밤마다는 대히트를 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춤에 대해 갈증을 느끼던 남자댄서들이 독립을 하게 된다.

물론 이성문을 비롯한 남자 멤버들이 탈퇴한 뒤에도 리듬터치는 계속해서 유지되어 여러 댄서들을 배출하게 되며, 후에 김완선이 데뷔를 하면서 김완선의 백댄서를 위한 댄스팀으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로드 매니저가 바로 김광수이다.

리듬터치의 멤버

  • 리듬터치 1기
    • 세 쌍둥이 여성(이름 불명)
  • 리듬터치 2
    • 김선분, 김후분, 김윤선
  • 리듬터치 3기
    • 김선분, 김후분, 이항우, 이상훈, 이주노
  • 기타 주요 멤버
    • 김완선, 허은, 박종호, 이영석, 최용석

04. 댄서들, 독립하다 (1983년)

스파크 댄싱 프로덕션

사실 이성문을 비롯한 리듬터치의 멤버들이 독립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당시 인순이는 한백희 밑에서 일하면서 전혀 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이것을 숨기고 있다가 당시 리듬터치 단장 역할을 하던 이성문에게 털어놓게 된다. 결국 이성문은 인순이의 편에 서서 한백희에게 호도를 하게 되는데, 이야기를 들은 한백희가 이성문에게 큰소리를 내었고, 실망한 이성문은 탈퇴를 하게 된다. 그리고 한백희보다는 이성문을 따르던 많은 단원들이 같이 리듬터치를 나오게 된 것이다.

당시, 이미 이태원에 터를 잡은 댄서들은 조금씩 댄서들만으로 구성된 댄스팀을 꾸리는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댄스계의 대표주자인 이성문도 그 흐름에 참여를 하게 된다. 그렇게 결성하게 된 팀이 바로 국내 첫 비보이팀이라고 할 수 있는 스파크다. 이성문은 당시 미래가 창창한 댄서 후배들이 가수의 백업댄서만 하면서 빛을 보지 못하는게 안타까웠고, 댄스팀 만으로도 활약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스파크의 이름은 공학도였던 이성문이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밤무대에서 춤을 춘다는 것은 여성들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유리벽을 뚫기 위해서는 뭔가 새롭고 대단한 것을 보여줘야만 했다. 그렇게 이성문은 추리고 추려서 20명 내외의 정예 멤버를 모집하고, 1진과 2진으로 나눠서(팀당 8명) 공연을 기획하고 연습하게 된다. 첫 오디션을 영등포 콜롬비아에서 하게 된 스파크는 성공적으로 오디션을 마치고 여러 클럽에서 공연 제의를 받게 된다. 스파크의 공연 구성은 굉장히 다양했는데, 브레이킹부터 재즈, 듀엣, 로보트춤 등을 스토리와 엮어서 약 15분에서 20분짜리 공연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성공적인 공연을 마치고, 콜롬비아 외에도 이태원의 골든웨이브 등에서도 공연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스파크가 공연했던 여러 장르 중에서도 유독 인기가 많았던 장르가 브레이크 댄스였는데, 이 브레이킹이라는 장르 자체가 댄서들 사이에서 떠오르고 있던 만큼 이 장르 때문에 갑자기 예상 못했던 변화가 일어난다. 여러 단원들이 이탈하면서 새로운 브레이크 댄스 전문 그룹을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개그우먼 팽현숙도 잠시 스파크 1기에 있었다고 한다.

*박남정의 경우 돈을 들고 찾아왔지만 키가 너무 작아 뽑지 않았다고 한다.

*스파크는 86년까지 신천동에 사무실을 유지하지만, 결국 이사하게 된다.

스파크의 초창기 멤버

  • 재즈팀(2팀)
    • 서병구(리더), 김한기, 김선분, 김후분, 김석장, 남순호, 허경필, 이영환, 지영하, 이영렬, 이문형, 노현태, 한정우 등
  • 브레이크팀(1팀)
    • 이항우(리더), 김한기, 이주노, 도건우, 제갈건, 임치벽, 이정효, 허은, 김윤성, 완이, 김승준, 정재호, 홍순미, 방갑수, 이정효 등

05. 브레이크 댄스의 태동기 (1984년)

노피플

스파크가 창단한지 약 6개월 후, 스파크에서 브레이킹을 담당했던 브레이킹 팀 멤버들의 욕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특히 브레이크 댄스가 다운타운 댄스계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이주노는 독립을 결심하게 된다. 그렇게 이주노를 포함해서 다섯명의 브레이크 댄서들이 스파크에서 나와 노피플이라는 브레이크 댄스 전문 댄스팀을 결성하게 된다. 그렇게 소규모의 인원을 통한 공연비의 저렴함을 앞세워(물론 그들의 실력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스파크가 공연하던 클럽 터치다운에서의 공연을 따내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5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노피플은 이태원 등지에서 최고의 댄스팀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계기로 이태원에 새로운 건물과 새로운 클럽들이 들어서면서 매니저를 자처하는 사람이나 방송 관련 사람들이 노피플에게 컨택을 하기 시작하면서, 노피플은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었던 이은하나 전영록 뒤에서 춤을 추기도 한다. 그렇게 노피플은 이태원 클럽과 방송가 모두에서 활약을 하게 된다.

하지만 1988년, 주먹패 관계자들이 반공갈식으로 노피플에게 공연을 요구하는 일들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노피플의 멤버였던 춤꾼들 역시 과거에 좀 날렸던 사람들이었던 탓에 주먹다짐으로 이어질 뻔 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당분간 잠수를 타는 것으로 방향을 잡는다. 하지만 누구도 잠수가 해체로 이어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잠수한 뒤, 멤버들이 한 두명씩 여러 이유로 다른쪽으로 빠지면서 노피플은 그 활동을 마무리하게 된다.

하지만 노피플은 90년대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 이주노가 서태지와 아이들로 성공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백댄서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노피플 멤버들

  • 노피플 1기
    • 이주노(리더, 1기), 황병덕(1기), 허은(1기), 이완희(1기), 이정효(1기), 이재민(고문)
  • 기타 주요 멤버들
    • 백원영, 박철우, 이채홍

노피플 활동 내역

  • <영화 : 방황하는 별들> 1986
  • 이은하 백업 댄서
  • 전영록 백업 댄서

06. 브레이크 댄스팀들의 탄생 (1985년)

써니(윤성한), 유니온(조승형) 등

1984년, 스파크의 성공에 뒤이은 브레이킹 댄스팀 노피플의 홀로서기는 여러 브레이크 댄서들의 마음을 자극하기엔 충분했고, 많은 댄서들이 브레이크 댄스를 전문으로 하는 댄스팀을 창단하게 된다. 브레이크 댄스와 각설이쇼를 접합해서 공연하는게 유행했었다고 한다. 85년을 기점으로 계속해서 브레이크 전문 댄스팀들이 탄생한다. 위에 언급된 써니와 유니온 외에도 D.M.C, 써브웨이, 메신저, 네트웍스 보이즈 등 여러 팀들이 창단되어 밤무대는 물론 방송가 까지 장악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움직임이 활발해진 데에는 스파크의 활발한 활동의 영향이 굉장히 컸을 것이다. 밤무대 외에도 TV 방송 출연을 더럿 하기도 했으며, 방점을 찍은 것은 1985년, 영화 춤추는 청춘 대학 이었을 것이다. 영화에 댄스가 주가 된 것은 물론 진정한 춤꾼들인 스파크의 멤버들이 직접 춤을 추기도 한 이 영화는 대한민국이 브레이크 댄스를 조금 더 깊숙하게 받아들이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됐다.


07. 전문 백업댄서 시스템의 탄생 (1986년 ~ 1990년)

스파크 댄싱 프로덕션 [보광동(1986~88), 신림동(1989~92)]

주로 밤무대에서 공연을 하게 된 스파크는 춤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줬지만, 여전히 현실은 혹독했다. 인원은 많은데 인당 8천원을 받고 공연을 해야하는 상황이니 생계가 유지되기 어려웠고, 심지어 이주노의 노피플은 인당 5천원에 더 적은 인원으로 공연이 가능했으니 경쟁력에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스파크가 살아남기 위해서 선택한 길은 전문 백업 댄서였다.

인순이와 리듬터치를 실질적으로 키웠던 역할을 했던 이성문은 이미 그 방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파크 산하에 아이댄싱이라는 안무팀을 만들어서 안무를 준비하던 와중에 가수 김승진과 그의 부친이 운영하던 보광동의 사무실을 쓰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김승진과 하얀손을 만들어서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다시 방송계에 발을 들이게 된 스파크는 김승진과 하얀손 이후에 김완선과 그림자, 장혜리와 에레스테, 이재민과 피노키오, 민해경과 블랙타이거, 박남정과 프렌즈 등의 활동을 통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모든 팀들이 순수하게 스파크의 멤버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스파크 출신이거나 스파크와 절친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백업 댄서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댄서들이 가수가 되기 위해 떠나게 되면서 점점 스파크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졌고, 그렇게 이성문은 제작에도 뛰어 들어서 4 년간의 노력 끝에 1991년, 혜성이라는 걸그룹을 데뷔시키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고 그대로 스파크와 함께 댄스계를 떠나게 된다.

스파크 2기 이후 멤버

  • 김석장, 도건우, 이영환, 허경필, 지영하, 이상훈, 현진영, 정복, 선미, 광미, 문내연, 이영렬, 남해주, 박신근, 양현석, 이정효, 윤성환, 남순호, 노현태, 윤초원, 양현석, 이윤성, 이정민, 강미진, 홍지희, 이미애, 강혜정, 백원영, 김영완, 현진영

스파크 2기이후 활동 내역

  •      <영화 – 그녀와의 마지막 춤을>
  •      <뮤지컬 –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08. 스파크가 댄스계에 끼친 영향

전문 백업 댄서

전문 백업 댄서의 경우, 전부 스파크가 전담으로 했다기 보다는, 기타 댄스팀의 멤버와 함께 활동을 한다던가 새로 댄스팀을 이뤄서 활동을 했던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모든 팀들과 모든 인원들이 스파크 소속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 스파크의 영향 아래에서 파생된 전문 백업 댄서팀이기 때문에 참고해서 보기를 바란다(하기 목록 외에도 그 외에도 유세원이나 최유나 등의 아티스트들 뒤에서 백업댄서 활동을 했다고 한다).

  • 김완선 오늘 밤(1986)
    • 이항우(블랙타이거)
  • 김완선 리듬 속의 그 춤을(1987)
    • 이항우(블랙타이거)
  • 김완선과 그림자(중간에 댄스팀 교체)
    • 김한기, 박용삼(함윤상과 코인즈), 이진호(함윤상과 코인즈)
  • 김승진 난 네가 좋아(1987)
    • 김승진과 하얀손 – 김석장, 남해주, 현진영
  • 장혜리 추억의 발라드(1987)
    • 장혜리와 에레스테 – 도건우, 이영렬, 지영하, 이영환, 허경필, 현진영
  • 이재민 제 연인의 이름은(1987)
    • 이재민과 피노키오 – 이재민, 이주노, 박철우
  • 민해경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있지만(1987)
    • 민해경과 블랙타이거 – 이항우(안무가), 최순환, 현진영, 서병구, 유주진
  • 민해경 그대 모습은 장미(1988)
    • 민해경과 블랙타이거 – 이항우, 현진영, 서병구, 최용석
  • 민해경 보고 싶은 얼굴(1990)
    • 민해경과 블랙타이거 – 이항우
  • 민해경 미니스커트(1991)
    • 민해경과 블랙타이거 – 이항우
  • 박남정 사랑의 불시착(1988)
    • 박남정과 친구들 – 김석장, 현진영
  • 박남정 널 그리며(1988)
    • 박남정과 써브웨이
  • 박남정 안녕 내 사랑(1989)
    • 박남정과 친구들 – 양현석
  • 박남정 널 그리며(1990)
    • 박남정과 친구들 – 이주노, 박철우, 양현석
  • 박남정 멀리 보이네(1991)
    • 박남정과 친구들 – 이주노, 박철우, 양현석, 김영완
  • 오복 Fire Dance(1989)
    • 오복과 오복성 – 이주노, 남해주
  • 나미 인디안 인형처럼(1990)
    • 나미와 붐붐 – 신철, 이정효

U.C.D.C 및 스파크에서 파생된 댄스팀들

방송 3사

  • MBC: 서병구
  • KBS: 김한기
  • SBS : 남순호, 이상호(1995~, 광주 UCDC)

댄스팀

  • 유니온(1985~):
    • 조승형(스파크 매니저)
  • 써니(1985~): 재즈브레이크 댄싱팀, 80년대 이후에는 부산에서 활동하였다.
    • 윤성한(스파크 1기), 이기성(한류문화 어린이 청소년예술단장)한정우, 장혜숙 주덕호, 배성현, 이철호
  • 메신저/블랙타이거(1986~): 메신저는 밤무대용 이름으로, 김완선 백업 댄스팀으로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민해경 전속이 됨
    • 이항우(리듬터치, 스파크), 최용준
  • D.M.C(1986~)
    • 김한기(대구 UCDC, 스파크 1기)
  • 네트웍스 보이즈(1987~)
    • 이문형(UCDC, 스파크)
  • D-Mart(1990~)
    • 이항우, 성대현, 신선호, 김정석, 김영호, 황복용, 김종국(킵식스), 유주진, 홍영주
  • 프렌즈(1994~): 엄정화, 이정현
    • 지영하(스파크 2기), 김석장, 서동철, 김종민
  • 노피플 2기/고릴라 크루(1984~)
    • 이주노(리듬터치, 스파크 1기), 하휘동, 남현준, 최승현
  • Ing 무용단(2004~)
    • 이영환(스파크 2기)
  • 피플크루(2005~)
    • 허경필(스파크 2기)
  • 꾼(2006~)
    • 노현태(스파크 3기, 거리의 시인들)
  • 김영희 재즈 무용단(1995~)
    • 김영희
  • 40대 동방신기/파파스
    • 한정우(파파스 때 탈퇴), 백원영, 장준진, 이영석, 최용석

기타

중요용어 및 인물

단체/그룹

  • U.C.D.C(United College Dancing Club) – 1979년 설립된 대한민국 최초의 댄스 동아리.
  • 스프링 삼총사 – U.C.D.C 초기의 댄스 트리오, 이성문, 박승대, 박우열.
  • LYTC(Little Young Turks Club) – 김규태가 스파크와 같은 시기 창설한 댄스팀.
  • 함윤상과 코인스 – 
  • 소방차 – 1987년, 이호연이 대성기획을 설립하면서 제작한 댄스 트리오.
  • 리듬터치 – 한백희가 제작한 인순이의 백업 댄서팀.
  • 스파크 댄싱 프로덕션 – 이성문이 설립한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댄스팀.
  • 노피플 – 이주노가 스파크에서 독립하여 설립한 대한민국 최초의 브레이크댄스 전문 댄스 팀.
  • 써브웨이 – 박남정을 필두로 설립된 댄스팀. 박남정의 백업 댄스팀을 맡기도 했다.
  • 메신저 – 블랙타이거즈의 밤무대용 명칭.
  • 아이댄싱 – 전문 백업 댄싱을 위해 이성문이 설립한 스파크 산하의 댄스팀.
  • 김완선과 그림자 – 리듬터치에서 파생된 김완선 전용의 백업 댄스팀.
  • 이재민과 피노키오 – 스파크/노피플 출신의 이재민의 노래에 이주노와 박철우가 백업 댄서로 선 팀.
  • 민해경과 블랙타이거 – 1986년, 이항우가 스파크에서 독립하면서 세운 댄스팀. 김완선과 그림자 이전에 김완선 백업을 맡았다.
  • 박남정과 프렌즈 – 스파크의 멤버들 중, 박남정과 친분이 있던 멤버들 중심으로 활동한 박남정의 백업 댄스팀
  • 혜성 – 이성문이 제작한 대한민국 최초의 걸그룹.

인물

  • 이성문(1959 ~ ) – U.C.D.C의 초대 회장이자,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리더, 그리고 스파크의 리더.
  • 김규태 – L.Y.T.C를 설립한 사람. 브레이크 댄스에 가까운 춤을 주로 구사하던 댄서로, 이주노의 스승/멘토격의 인물이다.
  • 이재민 – U.C.D.C와 노피플의 고문을 맡았던 로봇 춤의 대가. DJ로도 활동했으며, 국내 최초의 DJ 출신 가수이다.
  • 도건우 – 기계 체조 선수 출신의 댄서로, 소방차 2집 활동 도중 이상원이 탈퇴하면서 소방차 멤버로 합류한 멤버.
  • 송재준 – 캡틴퓨처라는 예명으로 가수활동을 하다가 작곡가로 전향하여 이승철의 소녀시대(1988)을 만들었음.
  • 미애 – 92년 데뷔한 철이와 미애의 미애. 한국 1세대 여자 댄서들 중에서 가장 춤을 잘 췄다고 한다.
  • 김태형 – 소방차의 1기 멤버.
  • 정원관 – 소방차의 1기 멤버.
  • 이상원 – 소방차의 1기 멤버. 2집 활동 시작 직후 탈퇴하였으나, 1994년 재결합때 합류함.
  • 김광수 – 여러 스타 가수를 탄생 시킨 제작자.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로드매니저로 시작해 김완선 매니저를 거쳐 제작자로 섰다.
  • 한백희 – 미8군 출신의 가수이자 제작자. 김완선의 이모로 희자매, 인순이와 리듬터치 그리고 김완선을 프로듀싱 했다.
  • 이주노 – 대한민국 굴지의 댄서로 서태지와 아이들로 활동했으며, 이후 제작자로 변신하여 영턱스 클럽 등을 제작했다.
  • 김완선 – 본명 김이선, 1986년 데뷔한 대한민국 최초의 댄스 가수.
  • 김윤선 – 김완선의 언니로 댄서 활동을 했었다.
  • 이항우 – 블랙타이거를 설립한 댄서. 이후에도 여러 댄스 그룹을 통해 활동을 했다.
  • 허은 – 이주노와 함께 댄서 생활을 했으며, 이주노 이전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로도 고려된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박남정 – 1988년 데뷔한 한국 최초의 남자 댄스 가수. 써브웨이의 멤버.
  • 지영하 – 스파크 출신의 댄서, 이후 프렌즈(박남정과 프렌즈와 별개)를 설립하여 가수 백업 댄서를 했으며, 홍대 NB를 설립, 운영중.
  • 제갈건 – 본명 제갈민, 제갈민과 울랄라로 활동했으며 이주노의 라이벌이었다. 이후 프로듀서로 전향하여 박효신을 프로듀싱함.
  • 현진영 – 본명 허현석, SM 최초의 아티스트로 현재는 재즈 장르의 음악으로 활발하게 활동중이다.
  • 이정효 – 댄서이자 DJ, 신철과 함께 더블 DJ를 구성해서 나미와 붐붐의 붐붐으로 활동했다.
  • 박철우 – 노피플을 따라서 노파킹으로 활동하다 노피플에 가입한 댄서, 이후 Ref로 활동했다.
  • 김승진 – 
  • 김영완 – 후에 김영환으로 개명, 콜라라는 그룹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이후 지영하와 프렌즈 활동을 했다.

장소

  • 팽고팽고 – 1970년대 말, 종로 3가 센트럴 호텔 2층에 위치한 나이트 클럽.(U.C.D.C)
  • 코파카바나 – 1970년대 말, 무교동에 위치한 나이트 클럽.(U.C.D.C)
  • 신라 호텔 – 1970년대말, 호텔에 나이트 클럽이 있었음(스파크)
  • 콜롬비아 – 1980년대 초, 영등포에 위치한 나이트 클럽.(스파크)
  • 로얄 호텔 – 1980년대 초, 명동에 위치한 호텔, 나이트 클럽이 있었음(스파크)
  • 골든 웨이브 – 1980년대 초, 이태원에 위치한 나이트 클럽(스파크)
  • 터치다운 – 1980년대 중반, 나이트 클럽(스파크, 노피플)
  • 마이 하우스 – 1980~90년대, 명동에 위치한 나이트 클럽(이항우)
  • 국일관 – 1980년대, 종로 3가에 위치한 나이트 클럽(이주노, 박남정)
  • 산다 호텔 – 1980년대, 호텔에 나이트 클럽이 있었음(신철)
  • 원투쓰리 – 1980년대, 영등포에 위치한 나이트 클럽(이항우)
  • 영 일레븐 – 1980년대, 영등포에 위치한 나이트 클럽(이항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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